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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형벌 '팽형' 지식채널e 본문
팽형(烹刑)은 고대 형벌 중 하나로, 말 그대로 삶아 죽이는 사형이다. 끓는 물에 처박거나,
불타는 기름가마에 던져서 죽인다. 중국의 모사 역이기가 이 형벌로 죽었다.
한국에서의 팽형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 명예형으로 바뀌어 실제적으로 삶아 죽이는 것이 아닌,
그냥 올려만 놓은 가마솥에 해당 죄인이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되었다. 팽형을 받은 죄인은
주로 양반이었으며 받고 나서 주변 사람들은 그가 없는 듯 행동하는, 사회적 사형이었다.
1. 사례
실제 중국에서는 팽형에 사용되었다는 솥이 발굴된 적이 있다.
이시카와 고에몽이 기름끓는 가마솥에 던져져 죽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일본에서도 같은 형태로 존재했던 형벌인 듯하다.
현대에 들어서도 공식적인 처벌은 아니지만 사례가 있다(...) 2002년 우즈베키스탄의 무자파르 아바조프(Muzafar Avazov)는 2002년
종교적인 이유로 체포된 후 끓는 물에 담겨지는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그의 사체의 머리 뒤에는 피투성이의 거대한 상처가 있었으며 손발톱은 모두 빠져 있었고
이마와 목은 멍들어 있었으며 온 몸에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2. 조선의 팽형
창천항로에 보면 이 솥과 똑같은 양식의 대형 솥으로 동탁이 나체의 죄인들을 삶아서 곰탕을 끓여먹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사실 이 이야기는 삼국지연의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를 조선에서 수입(?)하면서 굉장히 엽기적이지만 순화된 방식으로 변했다.
주로 탐관오리들에게 이 형벌을 가했다고 한다.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팽형의 진행 과정과 연계하면 이것이 명예형임을 알 수 있다.
이규태 선생의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의 팽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죄인을 앉혀놓고 "팽형을 하겠다."고 선고한 후, 가마솥을 내 온다. 가마솥을 내오면 집행인들이 열심히 장작을 넣고 불을 피우는 척을 하거나 종이 한장 넣고 태운다. 그럼 죄인을 아무것도 없는 빈 가마솥에 넣은 후 뚜껑을 닫고 잠깐 기다린다. 이 때 죄인의 유가족들은 정말 상을 당한 것처럼 막 통곡해야 한다. 그리고 죄인을 가마솥에서 꺼내는데, 이 때부터 그 죄인은 두 눈 뜨고 멀쩡히 살아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죽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조선에서는 죽은 자가 산 자를 애도합니다!!
그래서 죄인의 유가족들은 죄인을 죽은 사람 취급하여 말도 붙일 수 없고, 장사도 치러야 하고 시묘살이도 해야 하며 매년 제사도 지내야 하고, 당연히 죄인도 밖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며 낮에도 자기 집의 방 한칸에 갇히다시피 살면서 어떠한 편의 및 서비스도 받을 수가 없다.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다. 식사도 몰래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심지어 이러한 상황에서 부인과 정을 통하여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는 사생아가 된다. 조선 말기에는 몰래 돌아다니다가 놀림거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살아있으되 살아있지 않는 것과 같은 존재의 소멸. 심지어 자살한 사람은 나중에 무죄로 입증되면 신원이 회복되는 것과 달리 팽형을 택한 죄인은 죄가 없어져도 신원이 회복되지 않는다(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한마디로 목숨을 보존하는 대가로 명예가 영원히 죽어버린다. 아무리 그래도 중국 쪽에 비하면 꽤나 온건하다. 원래 조선은 유교주의적 입장에 따른 교화에 의한 통치를 중시하고 과도한 형벌을 금기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가 많았다. 죽이진 않아도 사회적으로 매장시킨다는 점에서 파문하고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보통 팽형을 하기 전 "자결과 팽형 중 어떤 걸 할 거냐?"고 물었는데, 자결을 택한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체면을 중시하는 것도 있었고, 앞서 언급했듯이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닐 정도로 정신적인 고통을 길게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팽형을 받는 사람도 많았다. 이러한 형벌이 고종대까지 진행되어 일본인과 선교사의 기록에 남겨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