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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만행 명성황후 시해 사건

야민 2013. 9. 24. 16:38









명성황후에 대한 외국 측의 기록을 보면 하나같이 그녀가 가냘프지만 영민하고 총명하며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여인이었다고 쓰여있다.



19세기말 한국을 다녀간 영국의 비숍 여사는 명성황후를 알현한후 그녀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왕후는 가냘프고 미인이었다. ... 눈은 차고 날카로워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석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 뿐 아니라 매우 매혹적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은 명성황후에 대해 또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지식은 주로 중국에서 얻은 것이었지만 세계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자기가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세력의 허를 찌르는 데 능했다. ... 그녀는 일본을 반대했고 애국적이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 그녀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들조차도 그녀를 동양의 호걸, 여장부로 평가했다. 지나치게 총명하고 정치에 적극적이었기에, 또 보기에 따라서는 시대를 앞선 매우 현대적인 자존감을 가진 여인이었기에 명성황후는 정적들의 표적이 되었고 신변은 늘 불안했다.

 

그리고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전쟁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정치에 깊이 개입하고 들어온 일본을 외교적으로 러시아를 동원하여 조선에서 축출하고자 했던 명성황후의 계획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본은 후안무치한 음모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일명 ‘여우사냥’으로 불린 명성황후의 시해시도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 데 가장 방해요소로 왕비였던 명성황후를 지목하고 제거하고자 하였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는 난입해 들어온 일본 낭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시해당했다. 시신마저 향원정의 녹원에서 불살라지는 수모를 당했다. 이것이 바로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이다. 이 을미사변을 지휘한 것은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였다.

 

외세에 의한 왕비살해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국내에서는 일본에 왕비 살해의 원한을 갚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국제적으로는 일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시아버지였던 대원군은 이 틈에 잠시 정권을 되찾는 듯하였지만, 고종이 이미 아버지마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 공관에 안전을 의탁하는 아관파천을 행함으로써 곧 실각하였다.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은 국격을 훼손당하고 망국으로 가는 길을 한발 더 내딛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시해 직후 대원군에 의해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고종에 의해 복호되었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황후로 추봉되었다. 장례는 죽은 지 2년 만인 1897년에 가서야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홍릉에 안장되었다. 요절한 두 아들 다음에 낳은 셋째 아들이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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